이곳에 남겨놓은 기록은 몽골국제대학교(Mongolia International University) 부총장으로 봉직하고 계신
이용규 부총장님의 몽골 강의를 들으면서 남겨놓은 강의 노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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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기즈칸
몽골사람들이 가장 위대한 시기라고 기억하고 있는 몽골 제국시대와 가장 위대한 인물로 뽑은 칭기즈칸에 대해서 이야기 해 보자.
사실은 몽골사람들이 칭기즈칸에 대해서 잘 모른다.
사회주의 내내 러시아의 영향으로 인해서 칭기즈칸에 대해서 이야기 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그래서 칭기즈칸은 언급하기 힘든, 금기 시 되는 인물 중 하나였다. 기자들 중 칭기즈칸을 언급했다는 이유로 처벌받거나 죽임을 당했었다.
몽골사람들 가운데 칭기즈칸을 본격적으로 연구한 사람이 거의 없었고 제대로 된 칭기즈칸 연구자는 없다고 보는 것이 옳을 듯하다. 몽골 제국이라는 나라의 역사를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중국어, 페르시아어, 아랍어 등 여러 언어들을 구사할 수 있어야 몽골 제국의 역사를 균형 잡히게 볼 수 있는데 몽골 사람들 중에 이런 언어들을 체계적으로 배우고 역사를 공부한 사람들이 없다.
만주점령시기 연구는 몽골어가 필요하기 때문에 고전 몽골어만 알아도 연구가 가능하다. 그래서 그 분야는 유명한 사람들이 있지만 그 외의 몽골 역사서는 몽골비사만 존재한다. 다른 사료들의 연구는 16가지의 언어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모든 언어를 포괄적으로 해야 몽골 역사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소련지배시대 때 이러한 연구를 체계적으로 한 사람은 없었다. 교과서에서 가르치는 몽골제국의 역사는 러시아 학자들이 러시아어로 기록한 것을 카피해서 붙여 놓은 것이다. 자신들의 눈으로 본 것이 아니라 러시아 학자들의 눈을 통해서 본 것이다. 시각적으로 굉장히 좁을 수 있다. 러시아의 연구가 디테일에서는 도움을 받을 수 있을 수 있지만 큰 그림을 그리기에는 부족한 것으로 알고 있다. 따라서 몽골 사람들이 갖고 있는 시각이 제한 적일 수 있다.
1970, 80년대 구미학계를 중심으로 정주민들의 시각이 아닌 몽골의 관점으로 몽골의 역사를 바라보려는 시도가 있었다.
하버드대학의 플레쳐라는 분은 이 세계를 움직였던 가장 중요한 민족 중 하나로 유목민을 꼽았다. 17세기에 중국과 만주를 지배하고 있었던 지배세력은 여진족이었고 그들 중 반은 유목민, 반은 농민이었다. 여진족은 말 위에서 살면서 사냥을 하던 사람들이었고 이들의 기마술 때문에 역사에서 굉장히 주도적인 역할을 할 수 있었고 중국마저 점령을 했었다.
몽골 다음으로 중국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가졌던 나라이자 중국의 현 지도를 가능케 한 청 왕조(명나라에 비해서 두 배인)는 스스로를 몽골 제국의 뒤를 잇는 국가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청 왕조의 태조격인 훙타이즈가 중국을 점령하기 전에 몽골부터 점령하는데 점령하자마자 칭기즈칸의 후예에게 전수되는 옥쇄부터 찾았다. 그리고 할하족은 만주족과 결탁하여 굉장히 가깝게 지냈다. 그 예로 중가르항극같은 나라가 청 왕조에 대항해서 분리를 시도하자 할하족이 중가르항극을 공격했다.
몽골 사람들은 청나라는 자신들과 같은 민족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티벳, 신강지역 사람들도 청나라에 대해서 마찬가지의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1911년 청나라 왕조의 장군이었던 원세개 장군이 청 황제를 죽이고 신해혁명을 일으킨 쑨원과 함께 중국 군벌을 일으키자 몽골은 그 당시 만주족과 친밀한 관계였기 때문에 그 후 중국으로부터 독립을 시도 했다. 만주, 신강지역도 마찬가지였다. 몽골은 그 후 러시아에 복속되고 티벳 지역은 자치국 지위로 존재해 있으면서 중국 공산당에게 버티어 왔으나 1950년도에 한국 전쟁이 일어나서 모든 서구 국가들이 한반도에만 관심을 갖고 있던 시기에 중국이 점령했다.
한족을 제외한 비 중국권은 본인들은 칭기즈칸으로부터 영향을 받았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으며 몽골제국의 영향력은 실제로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것보다 크다.
동쪽에서는 청이 몽골제국의 후예를 자처했었고
서쪽 지역을 장악하고 있던 유목국가들 중 대표적인 국가가 페르시아어로 몽골제국이라는 뜻을 가진 무갈제국이었다.
중앙아시아에서도 제국을 형성하려면 칭기즈칸 가문을 섭렵해야 했었다.
인도에 말을 타고 들어왔을 때에도 인도 지역이 유목민족의 말을 당해낼 수 없었다.
이란의 투르크 계통 유목민들.
서쪽의 오스만투르크는 아나톨리아 반도, 지금의 터키지역까지 가서 정착했던 사람들에 의해서 설립된 왕조이고 유목적인 기원을 가진 나라였다. 유목적 특성의 영향을 받은 오스만투르크는 동유럽의 대부분을 차지했었고 흑해 연안 그리스, 중동전체, 북아프리카, 모로코에 이르는 전 지역을 관할하고 있었다.
칭기즈칸은 몽골제국이 무너진 이후에도 엄청난 사회적 정치적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중국의 역사는 항상 북쪽에서 남쪽을 공격하는 형태였다. 전 유라시아 지역의 역사를 봐도 한반도만 남쪽 신라에서 북쪽을 공격했었고 한반도의 예를 제외하면 항상 북쪽 유목민들이 내려와서 남쪽을 공격하는 패턴이었다. 결국 남쪽의 경제력과 북쪽의 군사력이 결합해서 제국이 형성되었다.
전 유라시아에서 유목민들의 영향력이 컸던 것에 비해서 그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하는 이유는 돌궐비문을 제외하면 유목민들은 자신들의 역사를 기록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터키사람들이 돌궐비문의 보존을 위해서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아랍, 페르시아. 터키족(투르크족) 세 민족이 있고 투르크 족은 몽골 초원에서부터 기원한다.
이처럼 많은 민족들의 기원이 됐던 나라가 몽골이다. 끊임없이 북쪽 타이가 산림지대에 있던 사람들이 초원을 장악하고 남부지역으로 내려갔고 한국, 일본도 골격이 뚜렷하고 광대뼈가 있는 북방계와 남방계의 혼혈로 이루어졌다.
인도의 쿠샨왕조도 몽골민족에게 남쪽으로 쫓겨 내려가면서 형성된 것이다.
타지키스탄, 투르크메니스탄 등도 몽골의 영향을 받았고 러시아도 많은 경우 몽골 제국의 중요한 부산물 중의 하나라고 여기기도 한다.
러시아 제국의 사고방식 속에서는 18, 19세기에 민족주의가 강하게 일어나면서 이 사람들이 자기들의 역사를 재해석한다. 차이코프스키, 백조의 호수처럼 자신들의 민족적인 느낌을 찾는 것은 낭만주의의 영향이었다. 이러한 낭만주의 역사가들이 봤을 때 몽골제국의 시기는 이들에게 있어서 암흑기였다. 몽골의 굴레 때문에 러시아의 역사가 몇 백 년을 후퇴했다는 생각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현대 역사가들은 그렇게 보지 않는다. 정말 촌구석에서 사람들이 문화를 경험하고 적어도 다른 세계로부터 영향을 받을 수 있었던 유일한 통로가 몽골제국이었다고 본다. 한 유럽의 사가는 15세기, 16세기의 유럽에 대해서 18세기 이후 20세기까지 형성된 유럽의 이미지로 유럽을 보는 경향이 있다고 표현을 했고 실제로 15, 16세기 당시의 유럽은 다람쥐가 베르사유에서 출발해서 모스크바까지 여행을 할 때 한 번도 발을 땅바닥에 대지 않고 나무 위로만 다닐 수 있을 정도로 개발이 되지 않고 인구밀도도 희박했던 지역이었다.
강줄기를 따라 있는 Trading post가 러시아의 전부였고 우크라이나 지역의 끼예프 공화국과 같이 나무를 베어내고 조금씩 모여 사는 것이 러시아 도시의 전부였다.
이 사람들이 몽골의 침입 이후 개발이 시작되었다.
몽골 칸의 관심을 끌기 위해서 경쟁을 해야 했고 이런 시기가 지속되다가 18세기 뾰트르 대제에 가서야 비로소 초원지대에는 더 이상 제국이 형성되지 않고 발전된 유럽의 형태인 프랑스를 모델링하기 시작했다.
지금 러시아의 기본적인 문화 이면에는 굉장히 동양적인 정서가 있고 표면은 프랑스 적인 것으로 덮어 놓은 것들이 있다. 현대몽골 상류 문화를 봐도 프랑스 적인 것들이 있다.
보통 식사를 하러 식당에 가면 한국 사람과 몽골사람을 구분하는 방법이 있다. 한국 사람들은 외투를 의자 뒤에 걸고 몽골 사람들은 들어오기 전에 옷을 걸고 오페라 하우스 같은 곳에서는 외투를 따로 맡겨 놓는 곳이 있다. 외투를 실내에서 입는 것을 비위생적이라고 생각하고 외투는 밖에서만 입는 기능적인 면만 생각.
러시아에 갔을 때 화장실에 외투를 입고 들어가려 하니 아이들 교사 한 명이 옷을 걸어놓고 가라고 강하게 말해서 당황했던 적이 있었다.
서로가 옷에 대해서 바라보는 시각이 다르다. 그 때에는 그 사람들이 원하는 모습으로 맞추어 주는 것이 국제적인 에티켓이라는 생각. 이 사람들이게 한국적인 것이 우수하다는 생각보다는 나름대로 이들에게 형성된 많은 의식들이 뿌리가 있고 의미가 있다는 것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러시아가 적어도 15세기까지는 스텝지역에서의 영향을 굉장히 많이 받는다. 서구 학자들은 이 사람들이 얼마나 스텝에서 영향을 많이 받았는가에 대한 연구가 활발하지만 러시아 학계는 동의하지 않음.
러시아 역사를 유목적인 관점에서 보면 굉장히 재미있다.
나폴레옹이나 히틀러를 격파한 방법도 유목민들에게 당했던 방법들을 유럽인들에게 되갚아준 방법이었다고 보면 된다.
대부분 몽골의 몽골제국사를 다루는 교과서를 보면, 교과서마다 몽골의 정복사 -1. 러시아 정벌, 2. 중국, 3. 중동정벌- 과 같은 형태로 구분을 하지만 후세대의 관점에서 그들을 보는 것이다.
그 당시 몽골 사람들 입장에서 보면 러시아는 정령하기에 재미있는 나라가 아니었다. 점령해 봐야 얻을 것도 없는 나라였다. 그 시기에 중국 항저우에는 도시 하나에만 인구 백만이 살았고 러시아는 도시에 인구가 많아야 몇 만 명 정도에 불과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몽골사람들이 전쟁한 이유는 칭기즈칸이 우발적인 사고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라고 설명하기도 한다. 몽골에서 통일하고 초원에서 전쟁하는 과정에서 칭기즈칸을 괴롭히던 무리들이 전쟁에서 진 후 도망을 간다. 거기에 칭기즈칸의 고민이 있었다. 도망가는 무리로 인해서 유목제국을 성립하고 초원을 통일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통일하기 위해서는 도망가는 퇴로를 차단해야 했고 도망할 경우 끝까지 잡아낸다는 것을 보여야 다른 부족들이 이탈하지 않았다. 이탈 부족에게 끝장을 보겠다는 것이 칭기즈칸의 생각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끼예프, 모스크바 근처 숲 속으로 이탈 부족들이 도망을 가도 부하들이 끝까지 쫓아가서 끝을 보았다.
그 당시 러시아 끼예프를 포함해서 유럽에서는 말도 갑옷을 입히고 갑옷을 입은 기사들이 창을 들고 전쟁을 했었다. 기사들의 공격에 퇴각하면서 유럽 부대들의 전열을 길게 늘어뜨린 후 매복 혹은 중간 끊기 등의 전쟁방식을 통해서 유럽의 부대들을 전멸시켰다.
동유럽에서는 몽골초원에서부터 도망 온 사람들이 강한 군사력을 가진 것을 알았다. 그래서 투항한 사람들을 데리고 있으려 했고 뒤따라온 몽골 사람들이 투항한 몽골 인들을 내놓으라고 요청했으나 동유럽 사람들이 요청에 응하지 않았고 뒤따라온 몽골 사람들은 그 지역을 공격 후 초토화시켰다. 하지만 공격했을 때 얻어지는 이득이 공격하는 것에 비해서 이득이 되지 않았었다.
몽골에서 칸이 죽으면서 새로운 리더십이 나와야 하지만 그 다음 리더가 나오기 까지는 전투나 특별한 회의를 통해서 누가 가장 적합한지 선정하도록 되어있기 때문에 왕이 죽고 그 다음 왕이 즉위하기 까지는 항상 위험이 따르고 흩어져 있던 몽골 군대를 철수 할 수밖에 없었다.
몽골 사람이 가장 관심 있었던 지역은 중국, 인도, 중동지역이었다. 15~18세기까지 세계에서 가장 수출이 많고 돈이 많은 나라가 인도, 중국 이었다. 또한 가장 인구가 밀집해 있기 때문에 그 당시 세계제국을 경영하기 원하는 사람들의 관심지역은 그 지역이었고 그 다음이 중동-페르시아지역-지역이었다.
몽골 제국이라는 강한 나라가 형성된 이유는
첫째로, 군사력이다.
그 당시 탁월하게 강한 군대가 있었다. 전 세계 어느 군대도 이겨내지 못했던 강한 군대가 있었다. 군대가 강했던 이유는 이 사람들의 유목적인 삶 속에서 나온 것이다. 삶의 양태와 맞물려 있다. 이 사람들은 말의 발이 엇갈려가면서 달리기 때문에, 손을 놓고 활을 쏠 수 있었고 조직력이 있었다. 기존엔 기사와 장수 중심이었지만 유목민의 전투는 각 개개인의 전투 능력을 극대화 하는 방식으로 발전한다. 전투를 위해서 가장 많이 했던 것이 집단 사냥이었다. 겨울의 특정시간에 사냥을 하는데 그 이유는 자기들이 가지고 있던 가축들을 보호하고 다른 동물을 먹으면서 자신들의 가축을 보존함과 동시에 자신들의 공동체성을 함양하려 했기 때문이다.
중앙, 좌, 우로 나누어 좌, 우가 먼저 공격하고 세 면에서 포위해서 들어간다. 동물들을 좁혀 들어가고 모여 있는 동물들에게 활을 쏴서 죽임. 한 부분이라도 약한 부분이 있다면 모든 것이 허사로 돌아갈 수 있었기에 사냥에 참여한 모든 사람들이 철두철미 해야 했다.
유목민들이 게으르다는 것은 오해다. 유목민의 생활은 철두철미 해야 하고 젖을 짜는 것도 정확한 시간이 있고 데리고 걸어 다니는 것도 정확하게 시간도 잘 지켜야 했다.
전쟁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한 사람이라도 실수할 경우 심하게 징계를 받게 되었고 위계질서에 의해서 왕과 말단 병사의 몫이 다르긴 하지만 누구나 자신의 몫을 얻을 수 있었고 이러한 형태는 전쟁에도 그대로 도입이 된다. 그래서 강한 공동체성을 바탕으로 한 군사력을 갖게 된다.
서유럽에서 국민 각자 각자가 병역의 의무가 있다고 인식된 것은 나폴레옹 때부터이다. 내 나라는 내가 지킨다. 나는 자유를 위해서 싸운다는 것이 그 때부터 시작. 모든 성인 남자는 병역의 의무가 있다는 것이 그 때부터 형성되었다.
몽골 시대에는 모든 성인 남자들이 전투의 의무가 있었고 이 사람들이 가지고 있었던 여러 장점 들이 있는데 원거리 원정을 나갈 때 장비를 많이 가지고 갈 필요가 없었다.
역사박물관을 보면 유목 생활 속에서 나오는 여러 물건들이 있는데 대부분 허리에 찰 수 있는 밥그릇, 젓가락, 부싯돌, 작은 칼 등 휴대 가능한 것들이었다. 휴대할 수 없고 움직이지 않는 것은 가지고 다니지 않았다. 게르를 분해해서 소 한 마리가 끌 수 있는 수레에 넣을 정도가 됐었고 아예 전쟁을 나가는 사람은 게르도 가지지 않은 채 양털의 두터운 외투가 화살로부터 보호해 주기도 하지만 추울 때 그것을 덮고 눈밭에서 자기도 했었다.
음식을 보면 이 사람들이 참을성이 강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오랫동안 먹지 않고 상당시간 버틸 수 있었다. 몽골 사람들이 많이 먹는 사람이 아니다. 영화에 보면 유목민들이 바비큐 돌려서 우걱우걱 먹는 장면은 우리의 상상이다. 장거리 여행을 떠나기 전에 준비하는 식품이 있는데 가을에 소를 잡아서 피를 빼고 그것을 얇게 썰어서 말리면 소 한 마리에서 나오는 살이 소의 위장에 넣을 정도가 된다. 그것을 가지고 다니면서 솥에 물을 넣고 이틀에 한 번 정도 불을 떼어서 물을 끓이고 그곳에 건조된 소고기를 넣으면 그것이 불어난다. 열 명 정도가 소 한 마리를 15일 정도 먹을 수 있었고 몽골엔 샤브샤브가 없지만 Hotpot이 몽골에서 시작되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몽골리안 바비큐는 없었다.
세계최초의 ration 식품.
보통은 안 먹고도 잘 버티지만 말을 보통 4, 5마리를 한꺼번에 타고 다니다 지치면 한 시간 단위로 갈아타면서 달리면 보다 장거리로 달릴 수 있었고 가끔 너무 목이 마르고 배고프면 날카로운 대롱을 말목에 꽂아서 피를 먹기도 했다. 암말이 새끼를 난 상태면 젖을 먹기도 하고 최후의 수단으로 말을 먹기도 함.
몽골제국이 이전의 유목민들과 다른 점이 있었다. 칭기즈칸이 달랐던 중요한 차이점은 유목민이지만 정주민들에게 끊임없이 배우려 했다는 점이다. 정주지역에서 자신들이 봤을 때 필요한 것들은 끊임없이 배웠다.
예로, 여진족을 정벌하고 난 후 관료나 선비들은 죽였지만 장인들이나 농사짓는 사람들은 다 데려갔었다. 장인들은 무기를 만들던 사람이었다. 강하다고 생각했던 존재를 이기고 나면 그 사람들이 가지고 있던 장점들을 흡수하려 애썼다. 따라서 기존의 유목민들과는 다르게 공성전에도 강했다. 성을 쌓고 있으면 예전의 유목민들은 공격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칭기즈칸은 정주지역의 전투능력을 갖춘 사람들을 자신의 군대에 포함시켰었기 때문에 공성전도 가능했었고 원나라에 이르러서는 화약기술이 최고조로 발전한다. 최무선이 만든 화약도 원 대 때 개발되었던 화약무기를 우리나라가 편하게 쓸 수 있도록 개량하거나 답습한 것. 성을 어떻게 공격할 것인지를 잘 알았다. 이제는 성을 쌓아도 의미가 없어짐.
바다에 약하다고 하지만 몽골인들은 자신들이 약한 부분은 잘하는 사람을 사용해서 대체해 버렸다. 따라서 해전에도 강했다. 원나라 때 몽골제국시기에 굉장히 강한 함대가 있었다. 거기서 발전된 기술을 명나라가 답습하고 정화라는 사람이 아프리카까지 원정대를 보냈다. 정화가 탔던 배의 크기는 콜롬비아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할 당시 썼던 배의 4배 규모.
심지어는 몽골 사람들이 코끼리도 사용했었다. 동남아 지역을 공격해 들어갔을 때 동남아의 토후국들이 코끼리를 많이 사용했고 코끼리를 타고 가면서 활을 쏘니 높은 곳에서 쏠 수 있었고 말이 놀램. 몽골 활은 나뭇가지로 만든 것인데 습한 곳에서 활이 상해버렸다. 그 다음 전쟁 때 코끼리를 물리칠 방법을 고민하고 그 다음 전쟁 시 코끼리의 무릎을 공략했다. 그 땅을 장악하자마자 코끼리를 쿠빌라이에게 다 보내어서 초원지역에서 반란이 일어났을 때 코끼리를 타고 가서 진압했다. 그만큼 새로운 것을 받아들여서 본인들이 사용하는 것을 매우 잘했었다.
몽골 제국의 군대가 그 이전의 군대보다 강했던 이유는 칭기즈칸의 특정한 제도 때문이었다.
대부분의 유목생활은 부족단위였다. 개개의 부족이 독립적인 세력이었기에 이 세력을 물리쳐야 왕권을 확립할 수 있었다.
묵특선후 라는 사람이 아버지를 이기고 왕권을 섭렵하기 위해서 자기 휘하에 일만 명을 뽑아서 이 사람들에게 집중적인 교육을 한다. 명적(소리나는 화살)을 쏘면 소리 나는 방향으로 활을 쏘게 훈련한 후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애마 방향으로 소리를 낸 후 활을 못 쏜 사람들을 가혹하게 처벌했고 동일한 방식으로 자신의 애첩에게, 그리고 자신의 아버지에게도 쏘았다.
칭기즈칸이 이러한 방법을 따왔다. 어린 시절 아버지를 여의고 (타타르 족에서 독살당하고) 친족들이 칭기즈칸을 가차 없이 버리고 변절했다. 어려서 먹을 것이 없어서 쥐를 잡아먹고 어머니하고 이복동생하고만 살아남았다. 그 후 살아남기 위한 모든 것을 했다. 따라서 어려서부터 친족을 신뢰하지 않았고 자신의 이복동생 중 한명마저 활로 쏴서 죽였다. 친족들에게도 어려서부터 무자비하게 버림을 받았었기 때문에 씨족에게 의지하기 보다는 자기만의 친구집단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그 당시 몽골 초원에서는 금나라가 몽골이 하나로 통일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 부족 간의 싸움을 부추겼었고 그 결과 부족에서 이탈된 많은 떠돌이들이 생겨나게 됐는데 칭기즈칸은 그들을 흡수해서 칭기즈칸의 친위조직을 만들었다.
전쟁에 나갔다가 고아들을 데리고 오면 칭기즈칸의 아내가 직접 키웠고 극진하게 배려하고 사냥을 함께 나갔다가 아이들이 돌아오지 않으면 감독을 잘못한 감독관을 매로 쳐가면서 따로 챙기면서 챙겼었다. 이 사람들과 함께 생사고락을 같이 하면서 지냈고 전쟁에서 승리 후에는 이 사람들에게 철저하게 보상을 해줬다.
자무카라는 사람과 여러 차례 전쟁을 했었다. 칭기즈칸이 여러 번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 몽골 부족의 일반적인 경우에는 리더가 전쟁에서 패했을 경우 리더들을 버리고 부족원들이 떠나지만 칭기즈칸의 경우에는 실패를 해도 주변 사람들이 떠나지 않았다. 그리고 자무카의 경우는 결정적인 순간에 패배하자 주변사람들이 떠나고 더 이상 회복이 되지 않았다.
그들은 칭기즈칸을 통해서 새로운 공동체를 경험할 수 있었고 상벌이 분명하고 예상 가능하게 움직이는 이 사람을 따를 때 확실한 이득이 있다는 것이 분명하게 각인시켰기 때문에 칭기즈칸을 중심으로 만 명의 친위대를 만들고 친위대를 중심으로 60만 명의 몽골 군대를 움직일 수 있었다.
인도식당 하자르. 페르시아 말로 ‘천 1,000’이라는 뜻.
하자라. 부족을 해체하고 1,000명 단위의 군을 만들고 1,000명 단위의 리더의 위치에 자신이 신뢰하는 친위부대원들을 세웠다.
칭기즈칸의 성공의 원리.
몽골 사람들이 규율을 안 지킨다는 것은 늘 그랬던 것이 아니고 어떤 사람이 리더였느냐에 따라 달랐다. 다른 이의 말채찍을 훔치거나 물 가까이에서 오줌을 누면 사형 등과 같은 강력한 법령을 시행했었다. 유목 군대의 특성은 전투를 하다가 도망가면 전쟁에서 이기는 것보다 놓고 도망간 전리품을 챙기는 것에 정신을 팔렸지만 칭기즈칸의 군대는 어느 누구도 전쟁의 승리 이전에 전리품을 챙길 수 없었다.
@왜 몽골 제국 이후에는 다시는 그토록 강력한 국가가 더 등장하지 않을까?
몽골 제국을 거치고 난 다음에 여러 유목제국의 후예들이 몽골 제국의 영광을 찾기 위해서 노력을 한다. 티무르가 대표적인 예. 하지만 그 후 더 이상 세계제국이 일어나지 않았다.
군사시스템이 변했다. 말을 타고 활을 쏘는 것이 가장 강력한 무기였으나 총포의 등장으로 인해서 초원의 유목민이 가지고 있는 군사적인 상대적 우위가 감소했다.
정주지역 대룩국가인 러시아, 중국이 세력을 확대해 가면서 유목민들의 활동영역이 위축되었다.
예전의 무역 형태는 동서를 잇는 중계무역이었고 카라반들이 그 무역을 담당했었다. 무역로의 많은 지역을 유목국가에서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많은 카라반들이 세금을 납부했었지만 콜롬버스의 신대륙 발견 이후 무역의 중심이 육지가 아닌 바다도 이동하고 항구도시로 중심이 옮겨가면서 바다를 점령한 국가가 힘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따라서 유럽지역이 새로운 강국으로 부상하면서 더 이상 유목지역의 유목민들이 군사적인 우위를 가질 수 없었고 기술력 발전에 도태되기 시작하면서 한때는 거대한 국가 창출의 모판이었으나 현대에는 가장 쇠락한 국가의 형태로 남게 되었다.
@새로운 것들을 흡수하는 것이 쉬움으로 말미암아 기존의 세력과의 충돌을 어떻게 풀어갔는지 궁금?
성경의 다윗과 비슷하다. 다윗이 광야에 있다는 말을 듣고 모여든 사람들인 빚쟁이, 억울한 누명 등으로 인해서 공동체성에 속해 있을 수 없고 모여든 사람들을 다윗도 억울한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그들을 품을 수 있었고 공동체를 형성할 수 있었다.
기존의 체계 하에서는 별 볼일 없었지만 다윗 밑에서 진가가 발휘되었다. 예전에는 힘쓰는 사람이라 무시했지만 다윗 밑에서는 위대한 장군이 되었다. 그들을 중심으로 형성된 것이 다윗의 친위조직들이었다.
칭기즈칸이 마찬가지 경우. 이미 몽골 초원에 여러 부족국가가 형성되어있었고 칭기즈칸은 아무것도 없었지만 톨강 주변의 케레이트 부족장 사위로 들어와서 떠돌이들을 규합했었고 부담스러워했던 케레이트 족과 전쟁까지 하면서 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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